朝鲜族足球吧 关注:6,604贴子:275,828
  • 41回复贴,共1

우리 형 잔체

只看楼主收藏回复

뽈이 없는 날,우리 테바의 많은 분들의 아버지 어머니 혹은 삼춘들이 어떻게 결혼식을 했는가를 돌이켜 봅시다.지금의 우리보다 화려하지는 못했어도 행복했고 재밋었다고 봅니다.
드디여 큰 형이 잔체를 한단다.잔체날은 음력설후로 정했는데 아마 그때의 농촌에서 다 그랬듯이 봄부터 가을까지 농사일이 바쁘다보니 한가한 계절을 많이 택했던같다.
우선 사둔보기부터 아주 굉장했었다.동네 잘 사는 집에 가서 도랑끄를 빌려다 새각시 해입을 옷천을 몇개 넣는데 보통 테치라란 천이였다.부표를 갖고 합작사에 가서 끓어온것이다.사돈보기에는 량친부모,삼촌,고모 혹은 이모들이 동반해 가는데 가까운곳이면 당일에 돌아와 집에서 음식상 갖추고 온 동네를 청한다.누구도 빼놓지말고 다 청해야 결혼잔치에 오기때문이다.(사돈보기때는 그저 먹기에 그런같다)
잔체전날 나는 생산대소수레를 몰고 웃 마을로 증편을 가지러 간다.엄마가 이미 쌀이랑 다 갖다줬고 돈도 치뤄줬기에 그저 큰 다라에 실고오면 그만이였다.
집에는 벌써 외지 친척들이 가뜩 와 있다.채소를 좀 한다하는 분들은 가매목에서 콩알같은 땀을 흘리면서 분주히 돈다.
심바람은 은근히 나와 누나의 몫이였다.앞모태와 뒤모태를 나눠서 가는데 이미 오늘 잔체가 있다는거 다 아는 상황이라 그저 "저낙에 우리집에 와서 술 마입소"라고 하면 끝이다.
찰떡 치는 일은 둘째형의 몫이다,그는 자기또래 십여명을 불러 떡구시를 메다가 칠 준비를 한다.보통 잔체집은 찰떡을 대개 백이삼십근 치는데 그걸 치자면 혼줄 갈겨야 하고 한시간이상은 쳐야 했다.
술상은 친척분중에서 후근을 해본 분이 총지휘를 하고 몇분이 나서 몇집씩 책임진다.아무래도 우리집근처의 집들을 다 빌어 동네분들이 식사하는만큼 어느 상에 채소가 없으면 빨리빨리 갖다줘야 하니말이다.
술상심바람은 둘째형,누나.그리고 나의 친구들이 해야 한다.써료쟁판에 두비소절이요 고사리볶음이여 따라죠에 고기닦은게며 담아서 올린다.물론 사래는 여러집에서 빌려다 쓴다.
우리 엄마는 음식상 쓰기전부터 집밖의 채석에 서있다가는 구새목까지 왔다갔다한다.동네분들의 부조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보통 1원2원 3원도 많지 않았다.아줌마들이 워낙 몸베 거르마이에 돌돌 감아 넣었던 돈은 그 순간에는 쪼-옥 펴가면서 "에구,잘 먹었소,작소 받소"라고 하면서 고물이 뭍힌 찰떡주먼지를 손에 들고는 돌아간다.
어느새 엄마의 몸베 거르마이도 불룩해진다.그러면 인차 집 고방에 살그머니 들어가 오지둥기안에 넣어둔다.
똥빼주에 취한 사람들이 많다.개쌔기구 세쌔구 하는 소리가 이집 저집 술상에서 들려나온다.술먹으면 다 쎄내 하는게 술상 문화였던것 같다.


1楼2016-07-27 08:46回复
    동네서 오락을 한-다 하는 분이 여러집을 다니면서 인젠 술을 그만 먹고 오락을 시작하겠다고 "통지"를 한다.
    굵직굵직한 깔로 배즌 깔개에 숱한 사람들이 모여앉았다.웃방에는 새각시가 앉았기에 여자들이 배동하고 정제와 바닥,부스깨에도 앉은 사람 서있는 사람들로 붐비였다.
    사회자의 지휘에 따라 우선 선물증정이 시작된다.
    형과 가까운 친구들은 돈을 모아 꽤나 큰 소래와 밥통을 사서 선물한다.생산대에서도 체경(거울)에 축하의 말을 담아 빨간 글을 쌔겨 준다.
    이어 누구가 찬가를 부르겟으니 박수 쳐달라한다.무반주의 찬가이다.그저 도리북이 장단을 맞춰준다.흥이 난 몇명 청년이 꼬부장 허리를 해갔고 도리지춤을 냅다 춘다.
    깔개위로 뽀얀 문지가 올라온다.숱한 사람들의 멋진 춤바람에 일어난 문지들이다.
    이어서 동네서 최고로 불리우는 풍각재들이 표현을 시작한다.찬가에 손풍금반주,도리북과 새장구의 만남이 잔체오락의 고조를 가져온다.
    잔체오락은 밤 12시가 넘어서야 끝난다.그리고는 누군가 사랑칸에 들어가 닭 몇마리를 잡아와 중새(밤참?)를 먹는다.그럭저럭 잔체는 새벽 두시 세시 되여서야 끝난다.
    우에서 빼놓은것은 우리 형 잔체는 80년대초여서 신랑을 서방재라고 부르고 보통은 사지바지 입고 서방 갔었다.그리고 뒤문이 있는 사람은 대대의 2.8형뜨락또르 빌리고 생산대 쏘프퉈라지를 썼는데 여자들은 뭐 마선이나 사갖고 오는 시기였다.
    우리테바의 적지않은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바로 우리 큰 형과 같은 시기에 장가갔고 애를 낳았을거라고 봅니다.근데 지금보다 인상 있는건 잔체만 한다하면 외지 친척들이 몇일전부터 모여 놀고 일을 하면서 했는데 다들 자기집 자식들을 다 데리고 왔었습니다.그래서 6춘8춘까지도 다 면목있고 지금도 사이좋게 지내고 있습니다.근데 지금은?


    2楼2016-07-27 09:01
    回复
      인터넷상에서 주어온 사진들입니다.


      来自iPhone客户端3楼2016-07-27 09:18
      收起回复
        춤꾼들덕에 구들장이 깨지거나 내굴이 장판 틈사이로 올라오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남자들은 춤을 춘다하면 왜 그리도 바닥을 굴렀는지


        来自iPhone客户端4楼2016-07-27 09:21
        收起回复
          잔체 며칠후 집에서는 오락쟁이들이 잘 놀았줬다고 매 사람한테 양말 한컬레씩 례단 났습니다.그분들의 양말에 깔개에 엄지발가락이 구멍나고 뒤발축이 나갔기에 말입니다.


          5楼2016-07-27 09:49
          回复
            아주 어릴때 왕청 동신향 큰집에 놀러가서 이런장면 많이 봤던 기억남다 ~ 하하 재밌는글 잘 보고 감다 ~


            来自iPhone客户端7楼2016-07-27 11:27
            收起回复
              으흐흐흐,또 그때그시절 떠올리메 재밋게 읽구 감다.못살앗어두 그때 좋앗지 에?


              来自手机贴吧8楼2016-07-27 11:37
              收起回复
                정겹슴다. ㅎㅎ 아즈마이들이 힘들었겠슴다. 몇십명 밥하고 설거지하고 ㅠㅠ


                10楼2016-07-27 11:42
                收起回复
                  시골인정이 순순하고 풋했죠


                  来自Android客户端11楼2016-07-27 12:16
                  收起回复
                    이웃사촌이란데 지금현대생활은 이웃도 서로 왕래않하죠


                    来自Android客户端12楼2016-07-27 12:17
                    收起回复
                      울 부모두 80년대 초반에 결혼햇으니 년도수 거의 비슷함다 ㅎㅎㅎ


                      来自iPhone客户端13楼2016-07-27 12:30
                      收起回复
                        농촌에서는 소수레타구 서바가구 공사마을어서 살면 그나마 자동차라두 탈수있었지요.


                        来自Android客户端14楼2016-07-27 14:55
                        收起回复
                          잘 봤습니다. 읽고있노라니 옛날 기억이 저절로 나네요.
                          물질적으로 결핍했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즐거웠었던것 같습니다... ...


                          16楼2016-07-27 18:12
                          收起回复